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헤르만 폰 쿨 (문단 편집) === [[제1차 세계 대전]] === [[파일:world-war-i-german-general-alexander-von-kluck-with-cape-in-charge-BTKB5N.jpg]] ▲ 클루크와 제1군의 참모진. 가운데에 코트를 걸치고 있는 사람이 클루크이고, 왼쪽에서부터 세번째가 쿨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을 때 쿨은 [[알렉산더 폰 클루크]]가 지휘하는 제1군의 참모장이 되었다. 클루크는 쿨을 용기있고, 교양있는 사람으로 평가하였다. 쿨과 참모진은 능숙하게 프랑스군을 압박하였다. 에펠탑이 보이자, 쿨은 승리를 확신하였다. 하지만, 쿨의 예상과는 다르게 슐리펜 계획을 어긴 제1군과 2군의 격차가 심해질까봐 후퇴를 명령하였다. 하지만, 쿨은 후퇴에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마른 전투]]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였고, 쿨은 제12군 참모장이 되었다. 동부전선에 배치되었으며, 이후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의 제4군 참모장이 되었다. 쿨은 [[솜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그 공로로 푸르 르 메리트 군사훈장을 받았다. 이후 루프레히트 집단군이 생기자, 쿨은 루프레히트 집단군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독일 제국군의 참모총장이었던 [[에리히 폰 팔켄하인|팔켄하인]]은 쿨을 낙관적이면서 동시에 낙천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후에도 루프레히트 집단군의 참모장으로 싸웠다. 서부전선에서 루프레히트 집단군은 나름 잘 싸웠다. 1918년 미하엘 작전에서 루프레히트 집단군은 꽤나 큰 승리를 얻어냈다. 하지만,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갈라놓기에는 힘들었다. 리스 전투에서 루프레히트 집단군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갈라놓기 직전까지 갔으나, 전략적인 문제로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갈라놓려 했으나, 프랑스군의 막강한 저항때문에 불가능하였다. 소아송 전투를 계획하여 또 한번 돌파하려고 했으나 이번에는 독일군의 화력이 턱없이 부족하였다. 이후 루프레히트는 독일이 더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